2016년 8월 18일 목요일

히틀러와 불세출의 경제관료 샤하트

-세계공황으로부터의 기적적인 부흥-

序言
이 책은 히틀러의 경제정책을 연구하는 것을 주제로 하고 있다.
아돌프.히틀러는 말이 필요 없는 제2차 세계대전 최대의 전쟁범죄자이며 악의 대명사로도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장본인이며 많은 민족과 지역에 대하여 잔악한 행위를 했던 나치 독일의 최고책임자이다. 필자는 나치의 잔악행위에 대하여 옹호하거나 긍정할 생각은 추호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를 전부 부정할 필요까진 없지 않은가?
아돌프.히틀러나 나치스라고 하는 존재는 후세에 <100% 否定>에 가까운 평가를 받아왔지만, 그들도 한때는 독일경제를 붕괴로부터 구해내 독일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적도 있었다. 그들의 행위 가운데에는 후세의 경제정책에 힌트가 될 만한 것도 있었을 것이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을 때, 독일은 극도로 피폐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국력을 소진하고, 거액의 배상금까지 부과된 상태였다. 점차 복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에는 세계대공황이 닥쳐왔다. 독일은 엉망진창이 된 상태였다. 그러나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마자 경제는 순식간에 회복했고, 2년 후에는 선진국보다 빠르게 실업문제를 해소해 버렸다. 히틀러의 경제정책은 실업해소만으로 멈추지 않았다. 나치 독일에서는 노동자의 환경이 정비되어 의료, 후생, 오락 등은 당시의 선진국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다. 국민들에게 정기적으로 암 검진이 실시되고, 일정규모의 기업에는 의사의 상주(常駐)가 의무화되었다. 금연운동이나 메터발릭(metabolic)대책, 유해식품의 제한 등도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휴일에 연극을 관람한다든지 승마 등을 즐기기도 했다. 또한 매월 조금씩 (봉급을) 적립하면 바캉스 때 호화여객선으로 해외여행도 할 수 있었다. 사상문제를 떠나 경제정책에만 초점을 맞추어보면 히틀러는 유례가 없는 경제적 수완을 갖고 있었다.
독일 국민도 히틀러나 나치에 대하여 결코 나쁜 인상만을 갖고 있진 않았다. 1951년 서독에서 행해진 여론조사에서 반수 이상의 사람들이 1933년부터 1939년까지가 가장 좋았던 시절이었다고 답했다. 1933년부터 1939년까지라고 하는 시기는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전쟁을 시작하기 직전까지의 기간이다. 다시 말해 전쟁만 일으키지 않았다면 나치 독일은 국민들에겐 가장 좋은 나라였다는 것이다.

나치 독일은 공산주의도 아니고, 자본주의도 아닌 독자적인 경제노선을 펼치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활력을 살리면서 과도한 경쟁, 대기업의 횡포에는 제한을 가했다. 사회주의처럼 모든 것을 관리하진 않았지만 사회의 안전망(safety net)은 확실하게 정비했다. 그것은 현대 자본주의의 가혹한 경쟁사회에 한계를 느끼고 있는 우리들에게 뭔가 힌트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히틀러나 나치를 100% 긍정하는 것도, 부정하는 것도 아닌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그들의 경제시책을 살펴보자.
<히틀러, 나치스란 뭔가? 경제정책측면에서 탐구해 보자>라고 하는 것이 이 책의 취지이다. 이 책을 읽게 되면 반드시 히틀러나 나치스의 의외의 측면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序章
케인즈도 칭찬했던 히틀러의 경제정책이란
1940년 7월25일, 나치독일의 훈크 경제장관은 <유럽신경제질서>라는 계획을 발표했다.
<유럽신경제질서>라는 것은 간단하게 말하면 독일의 마르크를 유럽의 공통화폐로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르크의 통화권 내에서는 사람이나 물자의 이동을 자유롭게 하고 자본이나 노동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하자는 취지였다. 말하자면 유로貨의 나치版인 셈이다.
<이 계획이 실시되면 유럽은 물자의 부족이나 실업자 증가를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라고 히틀러가 말했다. 라디오를 통해 이 계획을 들은 영국 정부는 저명한 경제학자인 케인즈에게 이 계획을 비난하는 논문을 발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케인즈의 회답은 영국 정부가 전혀 예상하지 않은 것이었다.
<나의 의견으로는 독일 방송에서 인용한 부분의 3/4은, 독일이나 추측(樞軸)이란 말만 영국으로 바꾼다면 단연코 훌륭한 내용이다. 그것은 정확하게 우리자신이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케인즈가 영국 정보장관 니콜슨에게 보낸 편지[케인즈와 세계경제]에서 발췌-
이 계획이 발표되었던 당시의 나치 독일은 유럽의 절반 이상을 수중에 넣고 있었기 때문에, 마르크를 유럽의 공통화폐로 하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가능했었다. 그러나 <유럽신경제질서>의 도입은 그것만이 이유가 아니었다. 그 당시 나치는 금본위제통화의 결점을 꿰뚫고 그 결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공통화폐를 만들려고 했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쳐 세계의 화폐는 금으로 그 가치가 보증되고 있었다. 이른바 금본위제이다.
금본위제라고 하는 것은 화폐가 금으로 교환되는 제도이다. 화폐는 금으로 그 가치를 보증받기 때문에 화폐의 가치는 안정적이다. 그러나 한 나라의 화폐는 금의 보유량만큼만 발행해야 하기 때문에 금의 보유량이 적은 나라나 (보유량)이 격감한 나라는 순식간에 궁지에 몰리게 된다. 또한 금본위제 아래에서는 국제무역에서도 최종적으론 금으로 결제한다.
각국이 균형 잡힌 무역을 하고 있을 때에는 금본위제라고 해서 특별히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수출초과나 수입초과가 계속되는 경우에는 금보유량에 커다란 불균형이 발생한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가 그러한 상태였다. 유럽각국은 하나같이 금의 보유량이 줄어들었고, 미국은 전 세계의 금을 거의 다 끌어 모은 상태였다. 미국은 한때 전 세계 금의 70%나 보유하고 있었다. 이것은 세계적으로 불행한 일이었다.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물건을 사고 싶어도 금이 없어 살 수가 없었고, 미국은 물건을 팔고 싶어도 어디에서도 사주지 않았다. 무역은 축소되고 산업은 황폐화 되고 만다. 이것이 세계대공황의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라고도 말한다. 세계대공황 이후 유럽각국은 금본위제를 지속할 수 없어 줄줄이 금본위제를 폐기했다. 그러나 금본위제를 대체할 유효한 통화시스템을 찾아낸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로 인하여 무역은 축소되고 자국의 세력범위 내에서만 물자를 유통시킨다는 이른바 [블록 경제]가 생성되었다.
금본위제를 대신할 새로운 통화시스템은 모든 나라에서 모색하고 있었고, 어느 나라도 그것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특히 독일은 안전하고 범용성(汎用性)있는 통화시스템을 절실하게 원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극도의 인플레, 그 후 경제가 점차 호전되었을 때에 발생한 세계대공황, 이러한 (뼈아픈) 영향으로 독일은 통화문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배경에서 모색된 것이 <유럽신경제질서>였다. 그것은 결코 불쑥 생각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처럼 독일은 통화와 관련된 경험이 축적되어 있었다.
히틀러가 집권한 직후, 금과 외화의 보유량이 바닥났던 독일은 독특한 통화정책을 펼쳤다. 금본위제를 탈피해 독일이 갖고 있는 자산이나 노동력을 기준으로 화폐를 발행한 것이다. 외국과의 화폐교환은 각국과의 협정에 의해 결정한다는 오늘날의 통화관리제 같은 방법을 취했다. 이 시스템은 각국의 경제학자들이 <곧 파탄한다.> < 격심한 인플레가 일어난다.>라고 경고했지만, 파탄도 인플레도 일어나지 않았다. 독일은 인플레도 일어나지 않고, 금에도 의존하지 않는 화폐발행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또한 독일은 나치스 이전부터 통화정책에는 앞서 있었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식민지를 갖고 있었지만 (패전으로 빼앗겨 없어짐) 식민지에서 독일 본국과 동일한 화폐를 유통시켰다. 본국과 식민지의 화폐가 동일하다는 것은 수출입 등에서 대단히 편리하다. 이것은 오직 독일만 채택했던 통화정책이었다. 다른 歐美제국은 자국과 식민지는 별도의 화폐를 사용하고 있었다. 식민지에 자국의 화폐를 갖고 들어가는 것은 통화의 조절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일은 어떠한 어려움도 없이 본국의 화폐를 식민지에서 사용했다. 이처럼 <유럽신경제질서>는 면밀한 계획과 풍부한 경험의 바탕에서 생각해 낸 시스템이었다.

그때까지의 나치 독일은 당시의 상식으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경제정책을 여러 개나 내놓고 있었다. 금보유량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량의 공채를 발행하여 아우토반 같은 대규모 공공사업을 펼친다든지, 외화를 사용하지 않는 물물교환방식으로 무역을 한다든지, 노동조합을 모두 해산시켜 勞使를 일원적(一元的)인 조직으로 만든다든지 등등이다. 이것을 본 외국의 학자들이나 매스컴에선 <독일은 헛수고>라고 논평했다. 친독(親獨)적인 일본마저 나치의 전반기는 <독일의 기아(飢餓)수출>-1934년 4월11일자 時事新報-, <독일독재정책은 완전히 끝장이다>-1936년 2월17일자 오오사카매일신문- 라는 비판적인 기사뿐이었다. 그러나 그에 반해서 나치 독일은 비판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경기를 회복시켜 실업자를 사실상 제로로 만들고, 사상최대의 올림픽까지 거행하는 등 선진국 가운데 가장 활력 있는 국가로 우뚝 섰다. 그리고 이번에는 유럽공통화폐를 만들자고 말한다.
<이번에야말로 나치 독일의 시도는 대실패로 끝날 것이다>라고 생각한 영국 정부는 세계최고의 경제학자인 케인즈도 반론을 제기할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치스의 이 계획은 영국 정부의 생각과 달리 당대제일의 경제학자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유럽신경제질서>를 칭찬했던 케인즈는 나치 독일의 경제정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취지로 말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외환분야에서의 자유방임주의는 혼란을 초래했다. 관세는 회피수단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독일은 샤하트와 훈크가 필요에 따라 보다 더 훌륭한 것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이웃나라의 희생 위에 새로운 제도를 이용했다. 그러나 그 기초가 되어 있는 사고방식은 실제로는 건전하고 유용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영국이 독일의 적국이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최대한의 찬사가 아닐까? 케인즈가 이런 정도로 칭찬을 아끼지 않은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케인즈가 제창(提唱)해오던 경제이론을 가장먼저 실행에 옮겨 성과를 얻은 것이 나치 독일이었다. 나치는 정권발족과 함께 아우토반 등의 공공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실업자를 격감시켰다. 케인즈가 말한 <불경기 때에는 국가가 재정을 동원하여 경제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라는 말을 그대로 실행하여 대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케인즈의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은 1935년에 발표되었다. 나치 독일의 아우토반은 그것보다 2년 먼저 착공되었다. 다시 말해 나치 독일은 케인즈의 이론을 바탕으로 정책을 수립했다 기 보다 나치 독일과 케인즈는 원래부터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나치독일의 <유럽신경제질서>는 결국 실현되지 않았다. 그것이 가동되기 전에 나치독일이 연합국에 패하여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나치독일이 패배한 후, 연합국을 중심으로 새로운 국제경제질서를 구축하자는 이야기가 몇 번인가 나온 적이 있다. 그때에 케인즈는 금본위제를 탈피하여 나치독일이 주창한 <통화시스템>을 도입하자고 했다. 그러나 미국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세계경제는 그때까지 해오던 그대로 금본위제를 채택하게 된다. 그리고 세계는 주기적으로 통화위기를 일으키며 국제경제를 혼란에 빠뜨렸다.

제4장 천재 재정가 샤하트의 연금술

금융가 샤하트의 연금술
나치 독일의 경제정책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H.샤하트라고 하는 재정가이다. 나치 독일 초기의 성공적인 경제정책의
 대부분은 샤하트가 창안하고 실행한 것들이다. 아우토반을 필두로 한 거액의 공공사업비를 조달하고, 인플레가 일어나지 않도록 
교묘하게 통화량을 조절하고, 블록경제로 봉쇄된 세계경제에 숨통을 튼 새로운 무역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그의 공적을 열거하기엔 
지면이 모자랄 정도이다. 이 책의 제목도 <히틀러의 경제정책>보다 <샤하트의 경제정책>이 더 어울리지도 모를 정도다. 그러나 
샤하트는 나치 독일 중반기에 사직하고 만다. 그래서 이 책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準주역이 되고 만다.
갸름한 몸매와 예리한 눈빛, 엄격한 교사를 연상시키는 풍모, 히틀러보다 12살이 많은 이 사람은 기개가 넘치는 사내이기도 했다. 
그는 히틀러의 간청으로 나치 독일 전반기의 경제정책을 떠맡았지만 마지막까지 나치당에 들어가진 않았다. 나치를 감시하고, 
히틀러에게 쓴 소리를 할 수 있었던 마지막 사람이었다고도 한다. 이 장에서는 샤하트의 업적을 추적해 가며 나치가 어떻게 
경제정책을 입안했는지 소개해 보겠다.  

렌텐마르크의 기적
호레이스.그릴리.히야르마.샤하트(Horace Greeley Hjalmar Schacht)는 현재 덴마크령인 텐그레프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시민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인지 미국에 대하여 상당한 친근감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드레스너은행에 입행했고, 1916년에는 독일국립은행 이사에 취임했다. 
샤하트를 일약 유명하게 한 것은 1차 대전 이후 독일의 하이퍼.인플레를 수습한 <렌텐마르크의 기적>이다. 앞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지만, 1차 대전 이후의 독일은 베르사유조약의 막대한 배상금, 프랑스군의 루르점령 등이 뒤얽혀 천문학적인 인플레가 
일어났다. 그 인플레를 수습하기 위해 고안해 낸 것이 <렌텐마르크>라는 화폐였다. <렌텐마르크>라고 하는 것은 독일의 토지로 
보증해 주는 희귀한 타입의 화폐였다. 즉, 토지를 담보로 발행되는 화폐이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 때 통화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사용한 적이 있지만, 그 후엔 어느 나라에서도 사용한 적이 없는 방법이다. 어느 때라도 독일의 토지와 교환될 수 
있기 때문에 집행하는 쪽에선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방책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간에 인플레가 더 이상 극심해지진 않았다.
 금의 보유량이 적었기 때문에 금을 담보로 한 화폐를 발행 할 수 없었던 독일로서는 고육지책이 아닐 수 없었다.
1923년 이 <렌텐마르크>를 시중에 유통시킬 책임자로 샤하트가 선임되었다. 샤하트는 통화와 관련된 전권을 위임받는 조건으로
 그 직을 수락했다. 렌텐마르크는 1조 마르크가 교환되었고, 환율은 1달라=4.2 렌텐마르크로 고정시켰다. 그리고 렌텐마르크를
 도입 할 때에는 모든 신규융자를 금지시켰다. 높은 이율로 외화를 빌린 후, 그 돈으로 독일 국내의 부동산이나 상품을 사들였다가
 재빨리 되팔아 이익을 챙기려는 악덕상인이 횡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해 11월25일 마침내 렌텐마르크가 시중에 유통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인플레가 수습되고 독일 경제의 혼란이 멈추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샤하트가 독일제국은행의 
총재에 임명되었다. 샤하트는 마침내 독일 경제의 최고책임자가 된다. 렌텐마르크 자체는 샤하트가 발안한 것이 아니지만, 
그것의 실행책임자였기 때문에 렌텐마르크를 <샤하트의 마술>이라고도 한다. 샤하트는 아이들까지도 알만큼 영웅이 되었고,
 술집에서는<렌텐마르크가 위기를 구했다, 우리의 영웅 샤하트가 해냈다>라는 노래까지 유행했다고 한다.

1920년대의 미니.버블
샤하트는 독일제국은행의 총재가 되자 곧바로 미국과 공동으로 <골드.디스카운트 은행>을 만들었다. 이것은 미국으로부터 
독일에 대한 투자를 촉진하기 위하여 만들어 진 것으로 미국의 투자가와 독일의 기업가나 자치단체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골드.디스카운트 은행의 고문위원 14명 가운데 7명이 독일인, 7명이 외국인이었다.
호경기를 구가하고 있던 미국은 새로운 투자대상을 찾고 있었는데, 독일은 그런 면에서 최적의 투자대상이었다. 지금은 정체된
 상태지만 1차 대전 전의 독일은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의 공업국이었다. 따라서 통화가 안정되고 사회가 부흥되면 틀림없이 산업이
 발전할 나라였다. 이윽고 독일의 기업이나 자치단체에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투자금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독일은 단기간에
 번영이 이루어졌다. 미니.버블의 도래였다. 그러나 샤하트는 그런 현상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 샤하트가 <골드.디스카운트 은행>
을 만든 것은 독일의 수출산업을 진흥시키기 위해서였다. 독일의 산업을 부흥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한 투자라면 대환영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투자는 그곳에서 멈추지 않았다. 수출과 관계없는 이런저런 분야에도 투자를 했고, 투자는 비정상적이리만치 
과열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1차 대전에서 전혀 피해를 받지 않고 공장을 풀가동시켰던 미국은 썩어문드러질 만큼의 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갈 곳이 없어 썩고 있는 금이 앞뒤보지 않고 독일로 쳐들어간 것이다. 제조업뿐 아니라 음식업계, 오락산업, 지방자치단체의
 공공사업까지 모든 분야에 투자를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자가 결코 싼 것도 아니었다. 만만하지 않은 월가의 금융가들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뭉뚱그려 거액의 대출을 해줬다. 지금 무분별하게 빌려 쓰다간 뒷날 큰 고통을 받게 된다.
 <미국 경제가 붕괴되면 독일도 여지없이 말려들 것이다. 외국으로부터의 투자는 꼭 필요한 곳에 최소로 국한되어야 한다.>
샤하트는 강연이 있을 때마다 이 말을 자주 언급했다. 그리고 샤하트가 우려하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히틀러와의 만남
1929년 10월 월가의 주식시장이 대폭락하면서 세계는 미증유의 대공황으로 돌입했다. 미국의 투자를 무분별하게 받아드렸던 
독일은 큰 타격을 입게 된다. 기업은 차례차례 도산하고 거리에는 실업자가 범람했다.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우익이나 좌익의 
활동가들이 발호(跋扈)하기 시작했다. 1930년 가을, 세계공황의 소란 속에서 샤하트는 독일제국은행의 총재직을 사임했다. 
베르사유조약의 배상금문제와 관련된 연합국과의 교섭이 지지부진하자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형태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연합국측 위원에게 짜증을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기 때문이다. 그 해 총선거에서 나치당이라고 하는 기묘한 정당이 대약진을 했다. 
샤하트는 이 현상을 좀 더 알고 싶어 나치당의 당수가 쓴 <나의 투쟁>을 읽었다. 그리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샤하트는 이전부터 정치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정치문외한은 아니었다. 샤하트는 독일민주당(DDP)의 창당멤버이기도 했다.
 지나치게 앞서가는 좌익과 우익에 경계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온건하고 현실적인 정당을 원하고 있었다. 나치라고하면 극우정당을 
떠올리지만 당시의 독일정치지도를 보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좌와 우의 주장을 받아드리고 있는 온건한 정당이라고 말할 수
 있다. 히틀러의 유대인에 대한 인식도 그다지 위화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의 히틀러는 아직 유대인을 박해하는 정책을 
내놓지 않았으며, 샤하트도 <독일은 독일인에 의해 운영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샤하트는 그의 저서
<Aberechnung mit Hitler>에 그런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독일의 종교는 기독교이다. 기독교의 나라에서는 그 나라의 문화가 지향하는 방향을 기독교도가 아닌 자의 손에 맡겨선 안 된다.>
샤하트는 그로부터 얼마 후, 나치당의 간부인 헤르만.괴링의 파티에 초대된다. 그곳에서 히틀러를 만난다. 훗날, 샤하트는 히틀러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을 이렇게 쓰고 있다.
<자신이 옳다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 태도, 그리고 그것을 반드시 실행에 옮기려는 결의에 찬 그의 태도가 나를 압도했다. 틀림없는
 광신자이며 천부적인 활동가였다>
이후 히틀러와 샤하트는 급속하게 가까워졌다. 히틀러에게도 샤하트와의 교류는 막대한 메리트가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렌텐마르크의 기적>을 일으킨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나치당에는 이렇다 할 경제전문가가 없었다. 샤하트가 나치에 협력해 준다면 그것만큼 마음 든든한 것은 없다. 독일 국민의 영웅 샤하트가 나치에 합류했다는 것만으로도 나치의 주가는 급상승했다. 당시 나치는 도시에서는 급속하게 세력을 넓혀갔지만, 전국적으로는 아직 <산인지 바단지도 모르는 집단>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샤하트가 후원자가 되면서부터 확실히 지지자가 급증했다. 샤하트 쪽에서 보면 나치를 이용하여 독일 경제를 바로 세우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때까지의 정권은 불안정하고 우유부단하여 샤하트의 생각대로 경제정책을 펼칠 수 없었다. 나치라면 자신의 생각대로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1931년 나치당이 집권할 가능성이 높아졌을 때, 미국의 져널리스트인 드로치. 톰프슨이 샤하트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나치 정권에서도 경제를 다룰 수 있나?>
샤하트는 <물론>이라고 답했다.
<나치가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나치를 사용하여 통치한다.>

돈이 없는데도 국채를 발행하여 대성공
히틀러 정권이 탄생하고 2개월 후인 1933년 3월, 샤하트는 다시 독일제국은행총재가 되었다. 총재가 되자마자 우선적으로 취한 것은 히틀러가 발표했던 아우토반 등의 공공사업비를 조달하는 것이었다. 전술한 것처럼 샤하트는 우선 나라의 경제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국채를 발행할 수 있는 금액을 산출했다. 국채를 과대하게 발행하면 인플레가 일어난다. 그러나 전혀 국채를 발행하지 않게 되면 나라가 돈을 쓸 수 없어 경기가 좋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샤하트는 독일의 경제를 면밀하게 파악하여 인플레의 우려가 없이 발행할 수 있는 국채의 금액을 산출했던 것이다. 당시 독일은 1931년에 국내에서 두 번째 큰 은행인 다나트가 파산하는 등 금융위기에 빠져 있었고, 외화와 금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채를 발행하여 통화량을 늘린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샤하트는 교묘한 방법으로 그것을 성공시켰다. 금이 아닌 독일이 갖고 있는 노동력을 담보로 국채를 발행한 것이다. 이것을 노동어음이라고 부른다. 노동어음은 노동력을 갖고 있는 사업자가 그 노동력에 갈음하여 발행하는 어음이다. 이 어음은 자치단체가 은행에서 할인하고 그 돈으로 공공사업을 벌여 사업자에게 되돌려 준다.

노동어음은 최종적으로 독일제국은행이 보증하고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국채와 동일하다. 독일이 보유하고 있는 노동력에 갈음하여 발행되는 구조이기 때문에 <이서(裏書)없는 국채>는 아니다. 그래서 국민들은 노동어음의 발행에 그다지 불안감을 느끼지 않았고, 인플레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밖에 조세채(租稅債)-이 채권을 갖고 있으면 납세를 대신 하게 됨-나 납품채-상품을 생산한 양에 갈음하여 발행된 어음- 등 다양한 신용으로 경제를 활성화 시켰다. 샤하트는 이 정책으로 금을 보유하지 않고도 안정적으로 통화를 공급하여 경기를 회복시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샤하트의 장인정신
이처럼 샤하트는 독일의 금본위제를 없애는데 성공했다. 1936년10월말, 독일제국은행의 금보유량은 6,900만 마르크였다. 당시 통화량이 42억7천4백만 마르크였기 때문에 금의 보유비율은 1.6%에 불과했다. 이것은 당시의 보편적인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극심한 인플레가 일어나 경제가 엉망진창이 된다 해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 독일은 인플레가 일어나지도 않았고, 실업률은 극적으로 떨어졌고, 무역도 회복되고 있었다. 금본위제가 대세인 세계적인 흐름에서 봐도 그것은 기적에 가까운 현상이었다. 샤하트와 관련하여 이런 조크도 있었다. 미국의 한 은행가가 샤하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샤하트 박사! 당신은 미국으로 와야 될 것 같소. 이곳엔 많은 금이 있소. 진짜 은행업이 가능한 곳이오.>
그러자 샤하트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요, 당신이야말로 베를린으로 와야 될 것 같소. 이곳에는 금이 전혀 없소. 이거야말로 진짜 은행업이요.>
이 조크는 아마도 미국계 저널리스트가 샤하트를 비웃기 위하여 만든 것 같다. 그러나 당초의 의도와 달리 샤하트의 능력을 더욱 돋보이게 한 조크가 되고 말았다. 샤하트는 확실히 금도 없이 유사화폐를 다양하게 만들어 독일경제를 활성화 해왔다. 이것이 만약 심각한 인플레사태를 야기했다면 샤하트는 비판받았겠지만, 그의 재임기간 중에는 조심하지 않을 만큼의 인플레도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샤하트는 단지 신용창조만 확대한 것이 아니고, 금융의 긴축에도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군사채(軍事債)인 메포社債는 1938년까지 상환해야 한다고 히틀러를 압박했다. 히틀러도 끝까지 (압박에 굴하지 않으려고) 버티다 결국 상환에 동의하고 만다. 인플레를 일어나지 않게 하고, 경제를 활성화시켜 실업도 없애기 위하여 샤하트가 무분별하게 유사화폐를 만든 것이 아니고, 독일의 경제상황을 면밀하게 확인하면서 신용창조를 어느 규모로 해야 할지 조절했기 때문이다. 이 장인기질이야말로 샤하트의 진면목을 보여준 것으로 그것이 독일을 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샤하트가 금본위제를 완전히 없애버릴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역시 통화를 안정시키는데 가장 좋은 것은 금이 뒷받침되는 화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외국과의 무역에서도 최종적인 교환가치는 금이기 때문이다. 샤하트는 독일이 처한 상황을 <긴급사태>이며 <임시상태>라고 보고 있었다. 따라서 독일경제가 원상으로 회복된다면 금본위제로 되돌아갈 생각이었다. 그 문제로 훗날 히틀러와 첨예하게 대립하게 된다.

<이대로라면 독일은 도산한다.>라고 채권자를 협박하다.
샤하트는 이어서 외채의 감액문제에도 손을 썼다. 지금까지 여러 번 언급했지만, 독일은 베르사유조약으로 거액의 배상금을 걸머지고 있었다. 또한 세계대공황 이전에 미국 등으로부터 거액의 투자를 유치했다. 그것 때문에 대외채무는 눈덩어리처럼 부풀어져 있었고, 뭔가 손을 쓰지 않으면 독일경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치정권 발족 직후인 1933년 5월, 샤하트는 워싱턴을 방문했다. 6월에 런던에서 열릴 60개국 경제회의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에서 샤하트는 갓 대통령에 취임한 루즈벨트에게 <미국에 지불되는 이자를 정지 해야겠다>라고 말을 꺼냈다. 루즈벨트의 반응은 의외였다. 그는 무릎을 탁 치며 <월가의 은행놈들 꼴좋다.> 라고 즐거워했다. 대통령선거에서 월가가 루즈벨트를 지지하지 않은데 대한 반응이었으며, 당시 루즈벨트의 금융지식이 거의 문외한수준이어서 샤하트가 한 말이 어떤 뜻인지조차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그 말의 중대성을 알게 된 루즈벨트가 샤하트에게 분개를 표명한 문서를 보내왔다. 문서를 본 샤하트는, <분개하는데 24시간이나 걸렸다>라며 루즈벨트를 비웃었다.
샤하트는 워싱턴 방문 중에 채권국 대표들을 모아놓고 <채권자집회>를 열었다. 그곳에서 샤하트는 <이대로 빚을 거두어들인다면 독일은 파산하고 만다. 독일이 파산하면 당신들의 채권은 모두 휴지조각이 되고 만다.>라고 협박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당시 세계는 블록경제화가 진행되고 있어 세계무역은 큰 폭으로 축소되고 있었다. 공업제품을 해외에 수출하는 것이 독일의 유일한 수입원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사활의 문제이기도 했다. 샤하트는 계속했다. <세계대공황 때문에 여러 나라가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고, 평가절하를 하기 때문에 독일의 무역은 부진하게 되고, 독일제국은행은 외화부족에 시달리게 된다. 어쩔 수 없이 독일은 대외채무의 이자지불을 일시정지할지도 모른다.>
채권국들은 당연히 분개했지만 샤하트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독일이 진짜로 파산한다면 채권은 파(pas/중심이동)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그것 때문에 <이자지불의 일부를 일시적으로 정지한다.>라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1934년 4월에는 베를린에서 <트란스퍼회의>라는 게 열렸다. 이 회의도 외채의 상황방법을 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샤하트는 이 회의에서도 <이대로라면 독일은 7월1일에 파산한다.>라고 선언했다. 물론 <이자율의 인하>와 <채무감액>을 호소했다. 또 이런 말도 했다.
<독일 상품을 가장 많이 수입하는 나라와 빚을 깎아주는 나라는 특별대우 하겠다.>
물건을 사든지, 빚을 깎아주는 나라에게는 정확하게 빚을 갚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는 처음부터 특별하게 취급하여 채권국끼리 결속하는 것을 막았다. 확실히 샤하트는 민완(敏腕)한 협상가였다.
6월14일에는 세계의 각 신문에 독일이 모든 외채의 지불을 정지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영국은 7월1일 독일의 채무지불의 일시정지를 인정하고 잔액은 3%의 금리로 10년간 분할하여 상환하라는 조건을 제안해 왔다. 최대채권국인 미국은 집요하게 항의를 해댔지만 결국 영국과 같은 조건을 수락하고 만다. 샤하트는 미국에게 이자의 감액도 요구했다. 세계대공황 이전에 미국으로부터 독일의 각주, 시당국에 거액의 융자가 있었지만 이것은 월가의 전형적인 비즈니스 방법이었다. 독일의 자치단체들은 미국의 금융업자들에게 법외(法外)이자를 지불하고 있었다. 샤하트는 그러한 법외의 고리(高利)를 3.5%로 인하한다는 협정을 체결했다. 이렇게 해서 6천만 마르크의 이자를 줄였다.
1934년 8월 스위스의 바젤에서 <독일의 채권자는 독일에 투자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즉 독일의 경제 상황을 함께 개선해 나가야 한다.>라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이 말은 듣기에 따라선 지나치게 일방적인 자기주장일 수도 있다. 나쁘게 말하면 채무자가 갑자기 태도를 돌변하여 <내 형편이 피지 않으면 빚은 못 갚아..>라는 식의 말투였다. 채권자들도 결국엔 <모든 것을 잃는 것 보다는...>라며 마지못해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샤하트는 이런 식으로 깨나 많은 액수의 외채를 줄일 수 있었다. 샤하트는 재정가로서 강온양면전략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재사(才士)였다.

英佛美에 무역확대를 호소하다
당시 독일 경제가 궁지에 빠진 것은 수출이 부진했기 때문이다. 세계대공황 이후 유럽각국은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하여 잇달아 관세를 올렸다. 1931년 8월에 프랑스는 수입할당제를 실시하여 수입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9월에는 폴란드가 관세를 100% 인상하고 이어서 이탈리아도 15% 인상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유럽의 10여 개국이 그 뒤를 따랐다. 자유무역을 입에 달고 다니던 네델란드조차 25%를 인상했고, 영국과 독일제품에 대해서는 50%의 종가세(終價稅)까지 부과했다. 독일수출의 80%를 이들 나라가 차지했기 때문에 독일은 순식간에 궁지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그것이 560만의 실업자를 만들어 낸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샤하트는 나치 독일의 경제장관이 된 이래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각국에 독일의 궁핍상을 호소하고, 독일제품을 사달라고 간청했다. 외국에서는 나치의 말은 귀담아 듣지 않아도 샤하트의 말이라면 귀를 기울였다. 외국에서도 국제적으로 저명한 샤하트 만큼은 나치와 구별하여 취급했다. 샤하트도 그것을 최대한 활용하여 나치의 광고탑과 선전계(宣傳係)의 역할을 자임했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상품을 충분하게 사달라는 것이다. 우리가 획득한 외화를 금고 속에 넣어두는 것이 아니고, (곧바로) 외국에서 상품을 수입하는데 사용되기 때문에 그것은 국제무역을 활성화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샤하트는 독일제품을 사준다면 상대국으로부터 원료나 농산물을 사들여 상호이익을 창출할 수 있다고 호소했다. 또한 독일에 대하여 경계심을 고취하고 높은 관세장벽을 설치하는 영국과 프랑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이 경제적으로 강국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확실히 독일은 경쟁자이긴 하나 그것과 함께 고객이라는 점도 잊어선 안 된다>
독일의 인구는 7천만으로 유럽 최대의 시장이며 구매력도 크기 때문에 상부상조하자는 의미였다. 그러나 샤하트의 이러한 호소도 헛되이 구미각국은 한꺼번에 블록경제로 기울었다. 식민지를 갖고 있는 그들로선 국제무역을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 샤하트는 할 수 없이 구미(歐美) 이외지역의 국가들을 상대로 한 무역을 모색하게 된다. 만약 이때에 구미각국이 샤하트의 호소를 수용했다면 2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수입대금을 독일의 상품권으로 지불한 <새 무역시스템>
1933년 6월9일, <뉴 플랜>이라고 부르는 나치 독일의 새로운 무역정산시스템이 시작되었다. 독일이 안고 있는 외채는 민간 기업이든 공공기관이든 불문하고 모든 것을 독일제국은행이 일원화하여 관리하게 되었다. 외국기업에 채무를 안고 있는 사람은 외국의 채권자에게 직접 상환하는 것이 아니라 독일제국은행에 상환해야 한다. 독일제국은행은 예치된 상환금을 액면 그대로 외국의 채권자에게 지불하는 것이 아니고, 이자는 50% 할인하고, 원금은 50%를 현금이 아닌 “특별마르크”로 지불한다는 방식이다. 특별마르크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상품권으로, 독일을 여행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여행마르크”, 독일에 투자하거나 상품을 구입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레지스타 마르크”, 독일 국내의 개인이나 정당의 지원금에 사용되는 “아스키 마르크”등이 있다. 뉴.플랜이라 하면 듣기에는 그럴싸하지만, 쉽게 말하면 <독일은 수입대금을 외화로 결제할 수 없기 때문에 특별마르크로 결제 하겠다>는 것이다. 금이나 외화를 소모하지 않겠다는 샤하트의 의도가 짙게 드러나 있다. 수입대금이나 이자를 독일의 상품권으로 지불하겠다는 것은 지나친 파울(foul)이다. 그렇다 해도 당시 독일의 입장에서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파산을 모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 해 12월30일에 <내년부터는 원금 지불시 현금의 비율을 50%에서 30%로 낮춘다.>고 발표했다. 물론 외국으로부터 항의의 목소리가 높았다. 각국은 독일에 수출을 한다 해도 <독일 상품권>을 받을 뿐이다. 상대국들도 더 이상 묵과하지 않았다. 당연히 독일에 대하여 똑같은 대응을 했다.
1934년 8월, 스위스는 독일로부터 수입하는 물품대금의 결제를 업자끼리 정산하는 방법 대신 스위스중앙은행을 통해서 정산하도록 했다. 스위스중앙은행은 독일무역의 채권 뿐 아니라 독일과 관련된 모든 채권을 집중 관리하여 독일의 채무와 상쇄시킨 후, 그 잔액만 독일에 지불한다는 방식이었다. 이후 “스위스의 방법”을 따르는 나라들이 뒤를 이었다. 이것은 결국 피장파장이 되고 말았다.
뉴.플랜을 시행하고부터 독일의 무역은 곧바로 축소되었다. 그렇다 해도 금과 외화가 없기 때문에 뾰쪽한 수는 없었다. 그러나 뉴.플랜이 나쁜 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수입대금이 상품권으로 지불되었기 때문에 상대국은 어쩔 수 없이 독일 상품을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독일과 같이 외채에 시달리고 있는 국가들끼리 뉴.플랜에 따른 <정산동맹>이 결성된다.

수입제한과 수출 진흥
히틀러정권 2년째부터 독일의 수출이 축소되었다. 샤하트의 <정산시스템>에 대한 수입국의 불만이 높았고, 나치의 유대인 배척운동에 반대하여 각국이 (독일과의 무역을) 보이코트했기 때문이다. 독일경제는 아우토반 등의 공공투자로 국내경기는 좋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경제의 기축(基軸)인 수출이 부진하자 곧바로 정체에 빠지고 만다. 수출이 부진하자 외화가 줄어들어 수입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샤하트는 극단적인 수입제한 수출 진흥을 적극 추진했다. 1934년 9월부터는 샤하트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어떤 기업도 수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 외채를 채권자에게 직접 상환하는 자는 <조국의 경제 활력을 탈취하는 대역죄>로 간주한다고 경고했다. 1935년에는 새로운 수출진흥책을 내놨다. 10억 마르크로 수출진흥기금을 설치한 후, 수출업자에게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것이다. 10억 마르크의 자금은 산업계로부터 7억 마르크, 은행업계로부터 3억 마르크를 기부형태로 징수했다. 독일산업계가 전력을 기울여 세계시장으로 진출하고, 재군비나 그 외 분야의 원자재 수입에 필요한 외화를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수출업자들은 <덤핑정책>에 힘입어 수출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이집트의 경우는, 종주국인 영국을 제쳐놓고 독일제품을 수입하는 일이 많아졌다. 독일제품은 국가로부터 보조금을 받기 때문에 값도 쌌을 뿐 아니라, 예의 뉴.플랜으로 독일이 이집트의 면화를 물물교환 방식으로 사주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수입은 종전수준으로 묶어두고, 수출을 늘리는데 성공했다> 샤하트는 이렇게 자신의 정책을 자화자찬했다.

<물물교환>으로 확대된 독일무역권
독일의 새로운 무역시스템인 <뉴.플랜>에 대하여 반발하는 나라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나라도 많았다. 독일과 똑같이 세계공황으로 외화가 고갈되고 무역에 타격을 받고 있는 나라들도 많았다. 이러한 나라들의 입장에서는 실질적으로 <물물교환>에 의해 이루어지는 독일의 무역시스템이 더없이 유리했다. 동유럽이나 중남미국가들은 세계대공황으로 농산물가격이 폭락하자, 그로 인한 막대한 양의 잉여농산물이 발생하여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막대한 외채를 안고 있고, 금융 불안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외환을 통한 정상적인 무역거래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동병상련의 독일과 <물물교환> 형태로 무역을 하자는 협정이 체결된 것이다. 그들에게 인구 7천만의 독일시장은 매력적이 아닐 수 없었다. 무역은 곧바로 확대되어 동유럽은 마치 <독일광역무역권>처럼 되었다. 독일의 입장에서도 그들로부터 공급되는 원자재와 식료가 필요했다. 불가리아, 루마니아의 콩, 항가리, 유고슬라비아의 보크사이트와 마그네슘, 루마니아의 석유는 독일에게 필수불가결한 것들이었다. 또한 미국으로부터 수입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그를 대신하여 중남미로부터 고무와 식료품의 수입이 늘었다. 이렇게 독일의 <물물교환경제권>이 확대되어 영국 미국 프랑스 등이 만든 블록경제권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샤하트의 뉴.플랜은 블록경제로 막혀 있던 세계경제에 숨통을 터놓는 효과도 있었다..

각국의 금융위기에 편승하여 독일의 빚을 반으로 줄이다.
1933년부터 36년 사이에 구미각국은 달라, 파운드, 프랑을 시작으로 나란히 자국통화의 평가절하를 단행했다. 마르크도 당연히 평가절하를 할 것으로 국제경제계는 보고 있었다. 마르크만 높게 평가되면 수출에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정도로 수출을 독려하고, 외화획득에 결사적이었던 샤하트가 뜻밖에도 마르크의 평가절하는 하지 않았다. 샤하트는 외화획득보다 외채상환을 우선하고 있었다. 베르사유조약의 배상금이나 대공황 이전에 끌어 온 외국투자가 지금 독일의 경제를 힘들게 하는 주범들이었다. 이러한 외채를 상환하기에는 강한 마르크가 더 유리했다. 샤하트는 설사 수출업자들이 (마르크의 평가절하를) 요청해도 받아드리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샤하트도 마르크를 절하하고 싶은 생각이야 많았다. 수출은 독일의 생명선이며 수출이 부진하면 모처럼 상승하고 있던 독일 경제가 다시 침체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샤하트는 그것을 꾹 참고 강한 마르크를 유지했다. 렌텐마르크가 만들어진 당시에는 1달라=4.2마르크였지만, 3.4마르크를 거쳐 2.46마르크까지 높아졌다. 실제의 마르크 가치는 그것의 반 정도에 불과했지만 공정 환율은 그대로 적용되었다. 공정 환율 때문에 독일이 안고 있던 외채는 반으로 줄었다. 독일제국은행은 예의 뉴.플랜으로 독일의 수입업자에 대해서는 절상(切上) 이전의 환율을 적용했다. 이후에 발생한 환차는 제국은행의 이익금으로 처리되었고, 이것은 공공사업비나 재군비에 충당되었다. 또 샤하트는 <독일은 파산한다.>는 등의 말을 여기저기 퍼뜨렸기 때문에 독일의 배상금 지불을 위한 외국채권이 급락하여 거의 반액으로 줄었다. 그것을 본 샤하트는 채권을 서둘러 상환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래저래 독일이 안고 있던 외채는 반액 이하로 줄어들었다.

<무시당하지 않을 만큼의 군사력은 필요하다>
샤하트는 나치 독일의 재군비에도 손을 빌려줬다. 샤하트는 뉘른베르크전범재판에서도 이 점에 대하여는 명확한 입장을 고수했다.
<상대가 무시하지 않을 만큼의 군사력을 갖고 있지 않는 한 정상적인 무역은 불가능하다.>라는 것이 샤하트의 생각이었다. 1923년 베르사유조약의 배상금불이행문제로 프랑스가 루르지역을 점령했다. 아마 이 일이 샤하트의 뇌리에 깊숙이 각인되었던 것 같다.
세계대공황으로 파산직전에 놓여있던 독일의 국가재정에서 샤하트는 어떻게 군사비를 조달했을까? 여기에서도 샤하트다운 지모(智謀)가 번뜩였다. 샤하트는 재군비를 위해서 ‘메포’라는 유령회사를 만들었다. 메포社는 연리4% 5년 만기의 사채를 발행하여 군수메이저인 크루프 등 4개 업체에 분배했다. 이 메포社債는 언제라도 할인이 가능하며 독일제국은행이 보증하고 있었다. 군수업체들은 이 메포사채를 사용하여 무기제조에 착수했다. 군수업체가 하청업체에 발주한 물품대금은 메포사채로 결제했고, 하청업체는 메포사채를 할인하여 현금화할 수 있었다. 대금으로 받은 메포사채를 즉시 할인하지 않고 만기까지 갖고 있으면 연리4%의 이자가 붙고, 독일제국은행이 보증하기 때문에 즉시 할인하지 않고 만기까지 갖고 있는 업체도 많았다. 그 대신(독일제국은행은)아직 도래하지 않은 채권의 자금을 활용할 수 있었다. 또한 경제에 활기가 생기고, 정부는 현금을 사용하지 않고도 군비를 추진할 수 있었다. 샤하트는 메포사채야말로 <산업의 활성화와 실업난 해소를 실현시킨 창조적인 방법>이라고 자화자찬했다.
메포사채는 채권시장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심지어 독일제국은행 자신이 시장에서 메포사채를 구입하여 보유자산으로 삼을 정도였다. 메포社債는 그 내용상 사실상의 국채였다. 메포社라는 것이 국가가 만든 일종의 <페이퍼.컴퍼니>이며, 독일제국은행이 보증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가 국채를 발행하고 독일제국은행이 보증한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메포라는 회사를 중간에 끼워 넣어 국채를 발행한다는 것을 국민들이 알아채지 않게 했다. 국채발행이라는 말만 들어도 하이퍼.인플레의 악몽이 아직도 생생한 국민들이, 또다시 대량의 국채를 발행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패닉이 일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우려 때문에 메포社債라고 하는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이다. 메포에는 210억 마르크가 준비되어 있었다는 설도 있었다. 메포의 자금 일부에는 <뉴 플랜>에서의 이익금이 유용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인플레가 일어나지 않고 군비를 조달할 수 있었다.
1935년 3월9일 히틀러는 육군 36개 사단과 공군의 창설을 주축으로 재군비를 선언했다. 가장 격렬하게 반발할 줄 알았던 프랑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거의 반응하지 않았다. 이제 독일은 루르점령 때와 같은 무방비상태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무시당하지 않을 만큼의 군사력>은 달성된 셈이었다.

샤하트의 경제이념은 <이념이 없는 것이 이념>
다양하고 획기적인 경제정책으로 보기 좋게 독일경제를 부흥시킨 샤하트는 어떤 경제이념을 갖고 있었을까? 한마디로 말하면 <이념이 없는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935년 3월의 라이프치히 연설에서 샤하트는 이런 말을 했다.
<경제정책은 과학이 아닌 하나의 기술이다. 그래서 확고부동한 경제정책이나 불변의 경제법칙을 운운하는 것은 잘 못이다. 경제정책입안자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도 가능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말은 샤하트의 경제이념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바이마르시대의 독일 정부는 그 숭고한 이념과는 정반대로 현실적으로 유효한 정책을 거의 내놓지 못했다. 샤하트가 말하는 바이마르 시대의 정치는, <각 정당은 당의 이념을 무엇보다 중요시하여 경제의 근본적인 원칙을 무시했다. 그 결과 공적비용의 증대를 초래한, 즉 자유주의보다 훨씬 높은 고비용의 ‘낭비경제’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샤하트는 특정의 경제사상을 신봉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의 움직임을 보아가며, 실업자가 늘어나지 않도록, 경기가 악화되지 않도록, 적절하게 손을 쓰는 것이다. 그 수법은 어떤 때는 사회주의적이며, 어떤 때는 자본주의적이며, 어떤 때는 전통적인 상관습을 따르기도 한다. 실제로 샤하트는 카멜레온같은 정책을 구사해 왔다. 예를 들어 이런 일도 있었다. 히틀러정권은 발족 당초에 전력회사, 제철회사, 운수업 등의 거대기업 몇 군데를 국유화할 방침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해보니까 능률이 떨어지고 국유화의 메리트도 없었다. 그러자 곧바로 손을 떼 민간에 맡겼다. <경제는 이념이 아닌 현실이다>라는 것이 샤하트의 경제 사상이었다.

<국제경제에서 한 나라가 독주할 가능성은 없다>
샤하트는 무역에 관하여 특유의 이론을 갖고 있었다. 수출한 것만큼 수입하지 않으면 국제무역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샤하트의 저서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한 나라가 오랫동안 수출만 계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 못이다. 다른 나라의 상품을 사서 자국과 같은 정도로 발전시키지 않는다면 자국만의 경제적 발전을 지속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제수지가 일시적으로 출초(出超) 또는 입초(入超)가 나타나는 현상은 국제신용이라고 하는 트릭이 사태를 은폐하고 그것을 일시적으로 연장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무역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물물교환> 또한 <동일한 가치의 교환>이어야 한다.
이 이론은 나치 독일의 물물교환정책과 일치하는 것이며, 미국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 미국의 경제정책이라고 하는 것은 샤하트 뿐 아니라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모든 나라들로부터 비난받고 있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차 세계대전 전의 미국은 영국에 거액의 빚을 지고 있는 채무국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채무국에서 일약 세계제일의 채권국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물론 유럽의 전쟁에 편승하여 막대한 군수물자를 판 덕분이었다. 또한 전쟁으로 피폐해진 유럽이 쉽게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계경제에서 미국의 독주(獨走)가 계속되었다. 금본위제의 영향으로 대량의 금이 미국으로 유입되고, 거꾸로 유럽의 금은 대량으로 유출되었다. 이렇게 유입된 금을 미국이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에 버블현상이 일어났고, 결국은 그것이 붕괴되면서 세계대공황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당시에도 (미국은) 금을 움켜쥐지만 말고 대외원조라든지 해외투자를 통하여 금을 유통시키라는 소리가 높았었다. 대공황 이전부터 고통스러웠던 독일로서는 더욱 소리를 높여 미국에 호소했다. 샤하트는 전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호소했다. 1956년 에쎈의 청년경영자협회에서 행한 전후 최초의 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다.
<오늘날 독일은 연간 200억 마르크 이상의 상품을 외국에 팔고 있다. 이들 상품을 만들기 위한 비용은 마르크로 지불하고 있다. 그러나 수출하여 얻은 대금은 외화로 받는다. 수출업자는 독일연방은행에 가서 외화를 마르크로 교환한다. 그것 때문에 연방은행은 외화를 받으면 받을수록 마르크를 발행하게 된다.>
<만약 독일이 이대로 수입을 늘리지 않고 수출만 한다면 유통하는 마르크만 늘어나고, 물건은 늘어나지 않게 된다. 그러면 물가만 높아지게 된다.>
무역흑자라고하면 나라가 번영하고 있다는 상징적인 수치(數値)처럼 생각한다. 특히 일본 등의 몇 나라가 이러한 수치를 자랑해 왔다. 그러나 샤하트가 말한 것처럼 확실히 무역이라고 하는 것은 판 것만큼 사지 않으면 손해다. 자국에서 물건이 밖으로 나갔는데 들어오는 것은 금뿐이다. 그 금은 국외에서 사용하지 않는 한 국내의 물가만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일본이 전 세계에 물건을 살포하듯 팔면서도 크게 풍족한 생활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샤하트의 실추
샤하트는 독일 경제를 부흥시킨 최대의 공로자이다. 그러나 히틀러나 나치스의 간부들은 점점 샤하트를 싫어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잔소리가 많은 <금고지기>였기 때문이다. 히틀러나 나치 간부들이 돈을 쓰고 싶어도 샤하트가 “응”하지 않으면 쓸 수가 없었다. 특히 수입이나 군비에 관해서 샤하트의 목소리는 유난히 컸다. 무시당하지 않을 만큼의 군비는 필요하지만 그 이상의 군사비지출은 철저하게 억제했다. 전후 뉘른베르크법정에서 괴링은 이런 말을 했다.
<1934년 총통과 정부수뇌부의 회의에서 향후 300억 마르크의 군사비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자 총통은 “이 일을 샤하트에게 말해선 안 된다. 아마 300억 마르크라는 말을 들으면 기절하고 말 것이다. 우선 필요한 금액만 말해줘라”>
이처럼 나치 간부들에게 샤하트는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수입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수출을 조금이라도 늘리려고 안달인 샤하트는, 군용원자재를 특별취급하거나 농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높은 관세를 부과하려는 나치 간부들과 날카롭게 대립했다. 그 문제 때문에 1936년 봄, 원자재수입과 외환에 관한 전권이 샤하트로부터 괴링으로 넘어갔다. 수입과 외환이야말로 샤하트가 가장 까다롭게 다루던 분야였다. 그러나 나치 간부가 좌지우지하게 된다면 지금까지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결국 샤하트는 그런 조치에 항의하며 사표를 제출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사표를 반려했다. 全權위임법에 의해 히틀러의 명령은 절대적이며 사직을 하는 것도 히틀러의 허락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권력의 대부분을 잃어버린 샤하트는 그래도 독일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을 했다. 샤하트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국제적인 명성을 활용하여 해외각국에 독일 상품을 파는 것이었다. 그 해 7월에 그리스를 방문하여 1,350만 달라의 무기를 수주했고, 이어서 8월에는 크루프社의 임원을 데리고 불가리아와 터키를 방문하여 무기와 곡물의 물물교환협정을 체결했다. 이러한 샤하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샤하트를 점점 더 멀리했다.
1936년 9월, 뉘른베르크에서 거행된 나치당대회에서 제2차 경제4개년계획이 발표되었다. 이 계획이 수립될 때 샤하트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무역에 의존하지 않는, 자급자족을 겨냥한 이 계획은 샤하트의 생각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샤하트가 잔소리를 늘어놓기 전에 재빨리 결정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후부터 괴링이 샤하트를 대신하여 경제정책 전반을 지휘하게 된다. 이로서 샤하트는 경제총책의 지위를 완전히 빼앗기고 만다. 이때에도 경제장관직을 내놨지만 히틀러가 사표를 수리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잔소리 많은 샤하트를 멀리하긴 했지만, 국제적인 명성이 자자한 그를 함부로 취급할 용기는 없었다.
<괴링과 협조해 주십시오.>
이것이 히틀러의 회답이었다. 그러나 경제문외한인 괴링과 금융전문가인 샤하트는 협력 대신 충돌을 반복했다. 결국 1937년 11월에 히틀러는 샤하트의 사표를 수리한다. 대신에 샤하트를 무임소장관에 임명하고, 독일제국은행총재의 지위는 그대로 유지시켰다. 1938년 3월, 독일제국은행총재의 임기가 만료되었지만 히틀러는 샤하트의 임기를 4년 연장한다. 그 해는 라인란트진주, 오스트리아합병을 성공시킨 히틀러의 절정기이기도 했다. 히틀러는 아직 샤하트의 힘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샤하트는 유임의 조건으로 <메포社債를 1938년까지 상환할 것>을 제시했고, 히틀러는 마지못해 수락했다. 그러나 나치가 군사비 지출을 확대해 나가자 샤하트의 인내심이 폭발하고 만다. 1939년 연초에 샤하트는 독일제국은행 임원 8명의 연명으로 히틀러에게 진정서를 상신한다.
<이대로 세출이 늘어나는 것을 방치한다면 또 다시 파괴적인 인플레가 일어난다. 제동을 걸어주기 바람>
히틀러는 샤하트의 상신(上申)에 격노하여 마침내 샤하트를 파면했다. 이것으로 나치 독일에서의 샤하트의 역할은 모두 정지되었다. 아직 무임소장관의 직책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유명무실한 직책에 불과했다. 그러나 바로 그 시점에서 중요포스트를 집어던진 것이 훗날 그의 운명을 크게 좌우했다. 샤하트가 사라진 히틀러정권은 오르막길을 뒤돌아 내리막길로 미끄러지듯 마음껏 군비확산과 침략노선을 향해 돌진해 갔다. 이제 그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순 없었다. 그래도 샤하트는 독일을 위한 봉사를 멈추지 않았다. 1942년에는 괴링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단기결전의 찬스는 무산되었다. 화평교섭을 서둘러라>
결국 샤하트는 이 편지 때문에 무임소장관에서도 파면되었다. 1944년에는 히틀러암살그룹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게슈타포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연금 상태에서 종전을 맞이했다.
샤하트는 나치 독일의 재정을 떠맡은 남자이며, 나치 독일의 군사력은 그의 힘으로 만들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그가 마지막까지 나치 독일의 중요포스트에 앉아 있었다면, 설사 중요한 정책에서 소외되었다 해도 전후에 (전범으로 몰려) 사형을 면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절묘한 시기에 나치로부터 퇴출당함으로서 <금융의 천재>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 전후 샤하트는 전범으로 기소되었지만 무죄로 풀려났다. 그러나 그 후의 非나치化재판으로 근로봉사 8년의 형을 받고 1948년 9월까지 복역했다. 석방 후에는 뒤셀도르프은행에 들어가 인도네시아, 이집트 등 발전도상국의 경제 재정에 관한 어드바이서가 되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