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17일 수요일

중국과 우리나라 간의 조공 무역에 대하여

0. 조공 그 자체에 대한 기초적 지식은 굳이 언급하지 않습니다. 간단히 우리 입장에서 본 중국과의 조공 무역의 득실판단에 필요한 내용들만 정리합니다.


1. 시대의 특정


책봉조공은 수천년 동안 전근대 동북아시아 국제 관계의 기본이 된 외교 의례이므로 이에 수반되는 조공 무역의 역사 역시 굉장히 깁니다. 따라서 조공의 이해 득실 여부 역시 시대를 특정하여 살펴보는것이 타당하다 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중국쪽에서 조공 물품을 특정하거나, 그 수량과 질을 구체적으로 주문하여 우리에게 부담을 주는 일은 중국측에 특수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 한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명이 대량의 군마와 환관, 궁녀를 요구한 일은 명 건국초기 북방정벌로 인한 말 수요, 그리고 황제 권력강화를 위해 비대해진 궁내조직들의 인원 확충이라는 명측 사정 때문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청역시 비슷한데, 건국 초기의 막대한 물자공출 요구는 병자호란 이후 본격적으로 중국 본토를 공략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자원을 조선에서 조달하자는 속셈이 깔려있었죠.


하지만 명, 청 모두 앞서말한 자국의 사정이 어느정도 일단락 된 뒤에는 조선에 요구하는 공물의 양을 줄이는 경향을 보입니다. 장기적으로 과한 공물요구는 필연적으로 양국 관계에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들면 청사고 조선전을 보면 중국 제패에 성공한 청이 조공 물품을 감했다는 기록이 연달아 보입니다..


[康熙] 32년(A.D.1693; 朝鮮 肅宗 19) 朝鮮의 歲貢 가운데 黃金 1百兩과 藍靑紅木棉을 감면하였다.


[康熙] 50년(A.D.1711; 朝鮮 肅宗 37),皇帝는 朝鮮國王에게 지금까지 바쳐오던 貢物 가운데 白金 1천兩과 紅豹皮 142張을 면제하도록 하고, 朝鮮國의 使行이 머무는 沿途의 館舍를 수리하도록 諭示하였다.


雍正 元年(A.D.1723; 朝鮮 景宗 3) 禮部에 유시하여 朝鮮의 貢物 가운데 布 8백疋·獺皮 1백張·靑黍皮 3백張·紙 2천卷을 감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간단히 명대 혹은 청대로 한하여 접근하는 것에는 무리가 따르며 보다 더 시기를 특정하여 - 예로 조선 태종 또는 세종 재위기 같은 - 당대의 조공 무역의 실익을 논하는 것이 적절하다 생각합니다.


제가 알기로 김두얼 교수님이 인용하신 논문은 인조에서 숙종때까지를 다룬 것으로, 그 시기의 조선의 부담은 상당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하지만 위의 청사에서 알 수 있듯 청에 진상하는 조공물은 차츰 완화되기 시작하고 영정조에 가서는 사무역에 비해 극히 작은 비중만을 차지하는 것으로 줄어들기 때문에 이 시기 조공 무역을 분석하는 논문이 있다면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서술되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2. 무역에 수반되는 비용지출부담 고려


조공 무역은 "정치에 종속된 경제활동"의 동아시아적, 고전적 예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현대 우리가 무역에 대해 가지는 일반적 상식과 전혀 다른 식으로 조공 무역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공 무역은 조공물과 그 답례품, 그리고 사신의 수행원 자격으로 따라붙는 상인들의 사무역, 그리고 많은 수의 부진 물품들 처리로 이루어집니다. 원칙상 이 중 조공물과 답례품만이 "공적 거래"이므로 접객역시 이에 해당하는 만큼만 당사국이 부담하는게 우리의 상식에 부합하는 것입니다만 당시의 관례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 규모에 관계없이 "비공식적 행위"는 공식적 거래에 수반되긴 하지만 거론되지 않는, 비존재로 치부되는 것으로 다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조선의 사신 뿐 아니라 일체의 "수행원들"까지 압록강을 넘는 순간 그 체류비용 일체는 중국 왕조들의 부담으로 치부되었습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중국에 파견된 사신들의 일정 중 대부분은 압록강을 건너, 산해관을 지나, 북경까지 이르는 중국내 여정이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물리적 거리도 그렇거니와 비교적 순탄한 조선내 여정과 달리 희박한 인구밀도에 거친 자연환경, 경우에 따라선 통치가 미치지 않는 틈을 노려 창궐한 도적떼까지 출몰하는 힘든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신 일행의 안전보장과 숙소 및 식료 제공, 가이드 제공등엔 상당한 비용이 따랐으며, 여기에 북경에서의 체류비용까지 추가되는 것이 중국측 부담이었습니다. 이는 당대에도 중국측에게 결코 가볍지 아니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기록에 이를 암시하는 부분은 상당히 자주 보입니다. 관리들의 각종 뇌물요구, 질낮은 숙소와 식사 제공이 관례로 굳어진 역관...모두 "비공식적인 비용분담요구"로 생각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런 "손님접대비용 부담"은 동아시아 전체의 관례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경우 잘 알려진대로 평안도의 조세는 사신접대비용으로 현지에 유예되었으며, 명대 함경도의 조세 상당수 역시 여진과의 조공 무역관련으로 소비되었다고 합니다. 도쿠가와 막부는 조선 통신사 접대가 매우 부담이 되어, 재정의 4할을 여기에 쓸 정도라고 엄살을 부리기도 했고요. 어쨌든, 우리와 중국간의 조공 무역은 그 왕래에 있어 상대적으로 중국측 부담이 더 컸다는 것을 양자간 실익을 따지는 논의에서 빼먹지 말아야 할 이유는 충분할 듯 합니다.


참고로, 병자호란 직후 조선이 청에 바치는 공물에 대해서는 그 운송경비중 대부분이 조선의 부담이었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대한 연구가 조선의 적자로 결론지은것은 당연할 것 같습니다;;


3. 부진물품의 존재


일반적으로 조공은 하나의 외교적 예식이므로, 일정한 필수 물품이 포함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물품은 청대를 기준으로 "조공에는 금 100근, 은 10000냥, 저포, 종이, 소, 말, 인삼이 포함되어어야"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부담이 되었던 요소라면 대체로 귀금속과 말이 꼽힙니다. 한반도는 그 역사상 전반적으로 금, 은같은 귀금속 채굴량이 많지 않았고, 대량의 말을 사육할 수 없는 환경이었기에 조공으로 바치는 말을 구하는데 애를 먹었다는 언급이 실록에 자주 보입니다. 명과 청이 특정햔 시기 해당의 물품을 더 많이 요구한 점에 대해서는 앞서 이야기했습니다만, 그렇지 않더라도 해당 물품들은 마치 설날 차례상에 떡국 올라가듯 예식상 필요한 품목이므로 평시에도 일정한 양은 꼭 조공물에 포함시켜야 하기 때문에 우리 입장에서는 괴로왔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조선은 해당 물품들을 마련하기 위해 삼각무역을 시도하게 됩니다. 말은 주로 여진을 통해, 귀금속은 일본과의 무역을 통해 확보하고 이를 다시 중국으로 보내는 것이죠. 학자에 따라서는 양란이후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와 조선 정부가 비교적 쉽게 통교가 성립한 것을 이와 연관시켜 보기도 합니다. 광해군과 인조 초기, 명이 요구한 막대한 은을 피폐해진 조선내에서 채굴하여 조달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간에 이러한 "필수요소" 말고 다른 조공품은 없느냐...하면 사실 있습니다. 이를 부진물품이라 하는데 이 부분에 대한 논의가 사실 조공 무역의 실익을 따질때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고 제 정보원이 주장하더군요.ㅡㅡ


비유컨대, 외지에 나가살던 자식이 평소 아버지가 잘 드시는 밀감말고, 사과나 바나나를 추가로 사서 귀향길에 드린다고 합시다. 이에 대해 "왜 엉뚱한 것을 사오냐"라고 진심으로 역정을 내시는 아버지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조공에도 비슷한 경우가 성립되는데, "상국에게 정성으로 바치는 물건"에 대해 그 물건을 받아먹는 상국이 "이건 되쓰요"라고 거절하는 것은 여러모로 체면이 서지 않는 행위일 것입니다. 이러한 "정식 조공품목은 아니되, 조공길에 진상하는 물품"들을 가리켜 부진물품이라 한다고 합니다.


부진물품은 조공의 주체인 제후국의 왕은 물론이거니와, 관례상 왕비와 사신 본인, "기타 수행원이 정성으로 준비한 물건" 모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체면에 더해 기나긴 여로를 생각한다면 이러한 물품에 대해 상국입장에서는 가납하는 방법 외엔 딱히 대처할 수단이 없던것이 동아시아 전반의 관습이었다고 합니다.


부진물품은 그 자체로 조공품의 필수요소는 아니기 때문에 더 문제가 됩니다. 선물은 선물로 응대하면 되지만 이것은 애초에 예물이 아니라... 좀 애매한 형태의 물건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사신이 동반한 수행원들의 규모와 목적에 대해 모르는척 했던 당시의 외교관례를 알고 있습니다. 부진물품은 이 미심쩍은 위치를 역으로 이용해 매매의 목적물이 될 수 있었으며 많은 제후국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바 있습니다. 물론 우리도 예외는 아니고요.


부진물품에 대해 상국은 적당한 구매액을 지불하는 쪽으로 대처하였고, 또한 많은 부진물품의 존재는 황제의 회사품의 질과 양에도 영향을 미치곤 했습니다. 즉 구매액+회사품으로 이중청구가 가능했던 부진물품은 조공 무역이 "남는 장사인지 따져볼 때" 상당히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은 분명합니다.


부진물품은 당연히 조공품과 달리 구체적인 양이나 액수가 정식 기록에 남지 않습니다. 이는 수량적인 연구를 통한 접근에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행히 조선은 다방면에 방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국가이므로, 주의깊은 연구를 통해 어느정도는 이를 유추하려는 시도를 해볼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쩌면 관련 연구가 나와 이 부분에 대해 명쾌한 해설을 줄 지도 모르는 일이니 기대해 볼 일입니다.


4. 결론


중국에 바치는 조공의 "필수요소" 마련은 실제로 한반도 왕조들에게 부담이 되어왔으며, 특히 조선왕조 실록에서 이에 대한 한탄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익의 성호사설에도 관련 언급이 있고요. 하지만 이 물품 마련이 결과적으로 한-중-일 은무역의 기반이 된 점, 그리고 많은 량의 기록외 부진물품들의 존재를 고려해본다면 특정시기로 한정하더라도 조공 무역의 이해득실을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선 상당한 학술적 지식이 바탕이 되어야 할 것 같다는 짐작만 해봅니다.


어디까지나 흥미 차원에서 접한 사실을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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